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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15 15:54

역설의 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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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일 경향신문에 실릴 글입니다.

역설의 경제학

정태인(경제평론가)

‘절약의 역설’

나이 지긋한 분들은 혹시 기억하실지 모르겠다. 외환위기 직후 개그우먼 이경실씨는 경제가 어렵다고 무작정 허리띠를 졸라매면 안된다며 ‘합리적 소비’를 호소하는 공익광고를 했다. 케인스가 자신의 유효수요이론을 직관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고안한 ‘절약의 역설’을 이경실씨는 케인스보다 더 효과적으로 국민에게 전했다.

경제가 나쁘면 소비를 줄이는 것이 합리적이다. 호황기에 흥청망청 빚을 졌다면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렇게 행동한다면 아무도 물건을 사지 않게 되고 급기야 공장이 문을 닫을지도 모른다. 노동자들이 직장을 잃는다면 추가로 수요가 줄어들고 상황은 더 나빠진다. 약간 과장하자면 케인스의 ‘바나나 우화’(절약의 역설을 설명한 최초의 우화)야말로 거시경제학의 시작이다. 개인이건 기업이건 지극히 합리적 행위를 했는데 나라 전체로 보면 나쁜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소비를 줄이면 저축이 증가할 것이고 은행이 이 돈을 기업에 대출하면 투자가 늘기 때문에 ‘절약의 역설’이 항상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고전파 경제학의 세계에서는 저축이 바로 투자로 연결되도록 이자율이 정확히 조정될 것이므로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한치 앞도 보이지 않을 때는 기업가의 ‘동물적 본능’도 “조금 기다려보자”는 쪽을 선택할 것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정부가 나서야 한다는 것이 케인스 “일반이론”의 핵심이다. 사실 지금 같을 때 ‘합리적 소비’를 호소하는 것은 전혀 합리적이지 않다(더구나 돈을 빌려서 부동산이나 주식에 ‘투자’하도록 유도하는 것은 한마디로 미친 짓이다).

‘구조조정의 역설’과 ‘출산율 저하의 역설’

이런 ‘역설’은 경제 곳곳에 있다. 안개 속같은 경기라면 기업가들은 일단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 노동자들을 해고한다. 지극히 합리적인 행위이다. 그러나 모든 기업이 그렇게 행동한다면 나라는 실업자들로 넘쳐날 것이고 경제성장율은 바닥을 칠 것이다.

물론 고전파 경제학은, 아니 현재의 주류 경제학도 실업의 증가는 즉시 임금을 떨어뜨릴 것이므로 다시 고용이 늘어나리라고 가르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다. 한미 FTA가 발효되어 농업이 몰락하면 농민들이 쥐꼬리만한 월급만 받더라도 즉시 반도체 공장에 취직할 것이므로 한국의 GDP가 장기적으로 6%나 증가할 것이라는 ‘계산가능 일반균형모델(CGE)'의 오류가 바로 그렇다. 어쩔 수없이 그렇게 됐다면 해고된 노동자들이 되도록 빨리 더 나은 직장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무려 60년 전부터 스웨덴 등 북유럽 나라들이 실행한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렌-마이드너 모델)의 위력은 바로 여기에서 나왔다. 요컨대 어떤 변화로 인해 할 일을 잃은 생산요소들을 빨리 일자리로 이동시켜야 하는 것이다.

한국의 출산율이 1.13으로 떨어진 것도 합리적 행위의 결과이다. 대한민국에서 버젓한 사람이 되려면 이른바 일류대학을 나와야 하고 또한 ‘과외’를 시켜야 한다. 다행히 대학에 간다 해도 한 학기 500만원을 감당할 수 없으니 대표선수 하나만 낳아서 경쟁을 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모두 그렇게 행동하면 결국 인구가 반으로 줄어들고 1인당 성장률도 형편 없이 떨어져서(일하는 사람보다 부양해야 할 노인이 훨씬 많을 것이므로) 필경 현재 40대부터는  20년 후 국민연금도 못 받게 될 것이다. 현재의 제도를 그냥 놔둔 채, 아니 국제중학교를 만들어 초등학교부터 사교육을 하도록 강요하면서 애를 더 낳으라고 하는 것은 극도로 비합리적이다. 대학을 평준화하고 사교육을 없애면서 보육시설과 서비스를 대폭 늘리면 위의 세가지 역설이 동시에 해결된다. 쓸데없이 강바닥을 파헤치는 것보다 훨씬 낫지 않은가? 정운찬 총리 지명자가 케인스의 “일반이론”에서 익히 배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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