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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인(경제평론가)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


8월 2일 아침, 인천공항에 도착한 나는 어지럼증을 겪었다. 한국 사회가 움직이는 속도가 너무 빨라 오래 외국 생활을 한 사람이 느낀다는 현기증은 분명 아니다. 단 일주일의 여행이었으니 말이다. 바로 그 며칠 동안 이명박대통령이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을 꽤나 강하게 요구한 모양이다. “대기업 때리기”라는 말이 언론에 오르내리고 급기야 보수 쪽에서는 “희생양” “마녀 사냥”이라는 낱말을 동원해서 ‘대기업 감싸기’에 나서고 있다. 


문득 2005년 봄의 한 장면이 겹쳐졌다. “권력은 이미 시장으로 넘어갔습니다”. 재벌 총수들을 청와대로 초청한 고 노무현 대통령의 첫마디였다. 2004년 5% 가까운 경제성장을 거뒀는데도 경제가 곧 망할 것이며 따라서 대기업의 투자를 유도해야 한다는 언론의 아우성 속에서 열린 '대-중소기업 상생 간담회’ 자리였다. 대통령 비서관이었던 나는 재벌 총수들의 그야말로 횡설수설을 들으며  대통령의 속마음을  가늠하고 있었다. "어차피 호소할 거라면 화끈하게 한다”(지금 생각해 보면 그 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인식의 전환이었던 것 같지만). 


간단한 해결책, 근본적인 해결책


2005년 당시에 이미 한국의 중소기업 정책 목록은 세계에서 제일 길었지만 그 때도 또 다른 정책들을 ‘발굴’해냈다. 그러나 하청단가 후려치기 등에 대해 “3회 이상 하도급법을 위반한 기업을 정부 조달에서 배제한다”는 손쉬운 응징도 실천되지 않았다. 이번에 대안으로 제시된 ‘3배 손해배상제’ 역시 실천의 문제에 속하며 공정거래위의 전속고발권을 폐지한다거나 중소기업조합에 단체협상 권한을 부여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서해 바다 속에서 “1번 어뢰”를 찾아내듯, 또한 4대강 사업처럼 추진한다면 이대통령 쪽이 더 희망적임에 틀림없다. 이 일만큼은 이대통령의 완력을 지지한다. 이것이 간단한 해결책이다.


그러나 대통령은 대기업의 자발적인 협력을 원하는 모양이다. 이번에 내가 다녀온 이탈리아의 에밀리아 로마냐 지방이 바로 그렇다. 80년대에 피요르와 사베르, 자이틀린 등에 의해 “제3 이탈리아”, “유연 전문화” 등의 개념으로 소개된 지역이고 3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20인 미만의 중소기업 투성이면서도 세계적인 경쟁력을 자랑하는 “산업지구”, ‘중소기업의 천국’이다.


이 지역에서도 세계 경쟁 속에서 일부 의류, 신발, 가방 부문의 중소기업은 초일류 브랜드, 예컨대 구찌나 프라다의 하청을 맡게 되었다. 하청 단가를 설정하는 건 대기업의 몫이지만 이 지역 중소기업들은 반론을 제시하고 또 바꿀 수 있다. 이들이 암묵적으로 합의하고 지켜 온 기준은 “세계적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기술 투자를 할 여력이 있을 정도의 가격”이다. 합의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 CNA(수공업과 중소기업 연합회)와 레가코프(협동조합 연합회, 이 지역 중소기업은 협동조합인 경우가 많다)가 나서는 경우도 있다. 이야말로 자발적 상생이 아닌가.  


한국의 중소기업은 하청단가 때문에, 땅 값 때문에, 인력난 때문에 기술개발을 할 여력이 전혀 없다. 재벌들은 언제든지 중국이나 동남아로 외주를 주거나 아예 공장을 옮기려 하니 수직적이고 폐쇄적인 계열 속에서 중소기업은 말라죽을 운명이다. 그러나 주요 부품을 중국에서 모두 생산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한국의 재벌보다 더 자금 동원력이 있고 세계 곳곳에 기술인력이 우글우글한 중국 기업이 과거의 삼성이나 현대와 똑같은 방법을 쓰지 말라는 법이 어디에 있는가? 한국의 재벌은 정확히 상사(相死)의 길을 걷고 있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이 바로 에밀리아 로마냐에 있다. 이것이 근본적 해결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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